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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제법 다양한 책들을 읽어 보았지만,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 시리즈는 나름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의 글쓰기가 자신의 생각을 담으면서도 담백하게 서술하는 것이 매력적이다. 역사가의 거조한 글쓰기는 항상 기계의 언어를 읽는듯해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강교수의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밝히고 있어서 인간적이기 까지하다. 그의 이런 특성을 꽤 오랜시간에 걸쳐서 파악을 했다.
해방 이후의 정국은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터였다. 타협과 화합은 정상적인 시절을 살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전투성만 돋보였고, 중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6·25 전쟁 중 저질러진 학살의 예비 연습은 이미 40년대 후반에 충분히 이루어졌다. 규모의 차이만 있었을 뿐, 그 잔인성에 있어서 다를 건 없었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 할 폭력국가의 유산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복종적인 의식과 행동이 별로 극복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양극의 충돌이 해방정국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펼쳐졌다.

물론 해방 이후의 극단적인 정국은 타협을 거부한 좌우(左右) 양쪽의 책임이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욕망 에 더 치우쳤던 우익에게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우익은 일제와는 타협했어도 좌익과는 타협을 하지 않았다. 온건 우익은 소수였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강경 우익에게 있어서, 일제와의 타협은 자신들에게 권력과 금력을 가져다 줄 수 있었지만, 좌익과의 타협은 권력과 금력을 차지하는 데에 위협이 되거나 그걸 나눠먹어야 하는 타협이었다. 바로 이런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에 우선하였거나 이데올로기와 혼재되었을 것이다. 민중들은 쌀밥 한 숟가락을 위해, 어떤 이들은 더 잘 먹고 출세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제3장 분열에서 분단으로 / 1947년
김구·이승만의 권력투쟁: 반탁독립투쟁 11 | ‘우리의 소원’은?: 3·1절 유혈사태 16 | ‘철의 장막’과 ‘트루먼 독트린’: 이승만의 승리 23 | 이승만은 태양, 김구는 달 : 6·23 반탁데모 30 | 과도입법의원의 친일파처벌법 43 | 여운형 암살과 ‘테러 정치’ 49 | 장덕수 암살: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60 | 지하로 간 좌익 언론과 예술 71
자세히 읽기 : 리영희가 겪은 1947년 38 | 서재필의 귀국 41 | 여운형과 김구 58 | 77 | ‘마돈나’와 ‘모나리자’ 80

제4장 욕망과 폭력의 제도화 / 1948년
유엔위원단 입국과 단독선거 확정 85 | 단독선거 반대운동과 토지개혁 94 | ‘불야성을 이룬 도시의 요정’: 공창제도 폐지 100 | 제주도민의 10%가 죽은 대참사: 4·3항쟁 106 |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야 돼! : 김구·김규식의 방북 117 | 5·10 단독 총선거: 김구·김규식의 거부는 옳았는가? 126 | 단전(斷電)·적화(赤化)·기아수입(飢餓輸入) 136 | 대한민국 정부 수립 14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45 |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160 | 이승만을 총재로 모신 대한청년단 166 | 여순사건: 2천600명 사망 173 | 국가보안법 공포 189 | 제주에서의 ‘인간 사냥’ 195
자세히 읽기 : 서북청년회는 4·3과 아무 관계 없다 215 | 스웨덴에 0 대 12로 패한 런던올림픽 축구 218

제5장 반공(反共)의 종교화 / 1949년
반민특위와 학도호국단 223 |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의 와해 235 | 국민보도연맹과 전향·충성 경쟁 243 | ‘남한이 통곡 속에 싸였다’: 김구 암살 251 | 이조(李朝)의 부활인가?: 이승만 우상화 260 | ‘사바사바 정치’와 ‘요정 정치’ 273 | 개신교의 반공·친미주의 279 | ‘연설 정치’와 ‘혈서 정치’ 288 | 6·25 직전, 무슨 일이 벌어졌나 298
자세히 읽기 : 그날이 오면 313

맺는말 전투적 극단주의의 배양 315